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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인정하지 않는 한국사 바로알기

하마입 2024. 5. 18.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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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역사에 관심 많으신가요?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잖아요. 그런데 가끔은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주장 때문에 어떤 것이 사실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특히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몇 가지 있는데요. 오늘은 그 중에서도 중국이 인정하지 않는 한국사에 대해 알아보려고 해요. 함께 깊게 파보며, 바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중국이 인정하지 않는 고구려의 역사적 정체성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어 기원후 668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고대 국가이다.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국의 여러 왕조와 교류하며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다투었다.

그러나 중국은 고구려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 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 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왕을 황제라 칭하였으며,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또 중국의 왕조와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신라와 백제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라 독립된 국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지리적으로도 고구려는 중국과는 다른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고구려의 영토는 현재의 북한과 중국의 만주 지역에 걸쳐 있었는데, 이는 중국의 영토와는 구분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증거들을 무시하고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 시키려고 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해치는 것이며, 한국 국민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구려의 역사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발해의 창건과 중국 역사 속 위치의 오해
발해는 698년에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모산 기슭에 세운 나라로, 926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당의 문물을 수용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일본과 신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들과 교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발해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이유인 즉 발해의 주민 대부분이 말갈족이었으며, 발해가 당의 책봉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중국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실제로 발해의 주민 구성은 말갈족이 다수를 차지했지만, 고구려 유민도 적지 않았다. 발해의 왕족과 귀족은 대부분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고구려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하였다. 게다가 당시 당과의 책봉-조공관계는 동아시아 각국 사이에 이루어졌던 일반적인 외교 형식이었다. 그럼에도 마치 주종관계처럼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따라서 발해사가 한국사의 영역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히려 중국의 논리대로라면 같은 시기 중원지역을 차지했던 요나라나 금나라 역시 중국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중국의 주장은 역사적·논리적 근거가 박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와 중국의 역사적 관계 재해석
한국의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는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종종 중국의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다. 

먼저, 고구려는 중국 왕조들과 빈번한 전쟁과 교류를 했다. 중국 측에서는 고구려를 자국의 속국 또는 번국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실제로 고구려는 독립적인 국가로서 존재하며 중국과의 경계를 두고 경쟁하기도 하였다.

백제의 경우,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문화적·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일부 중국 역사가들은 백제를 중국의 속국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이는 당시 활발했던 국제 교류의 양상을 무시한 편협한 시각이다. 백제는 중국과의 조공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독립적인 국가였다.

신라 역시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자국의 발전을 이루었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당과의 군사적 동맹을 통해 삼국통일을 이루기도 하였으며, 당의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국의 문화 발전에 활용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신라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며, 양국간의 상호 협력과 교류의 측면을 강조해야 한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한중 관계는 단순한 지배-피지배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국가 간의 상호 작용과 교류의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

고려시대의 대외관계: 중국과의 실제 역사적 교류
고려시대는 중국 송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일부 역사가들은 고려를 자국의 속국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적 관계에서 자주성을 유지했다. 예를 들어,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송나라의 지원을 받았지만, 이후 송나라가 고려에 대해 과도한 간섭을 하려고 하자 이를 거부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 고려는 송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면서도, 자국의 특산물을 수출하여 독자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문화적 교류도 활발했다. 고려는 송나라로부터 유교, 불교, 도교 등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국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예로는 고려청자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송나라의 청자 기술을 받아들여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또 고려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중국의 역사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한국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는 고려가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고려시대의 한중 관계는 일방적인 의존 관계가 아닌 대등한 입장에서의 교류와 협력이었다.

조선시대, 중국과의 tributary system과 실질적 독립성
조선시대는 중국과의 조공관계(tributary system)를 유지하면서도 실질적인 독립성을 유지한 시기였다. 

조공관계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주변 국가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공물을 바치고,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을 말한다. 조선은 건국 이후부터 중국과의 조공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러한 관계는 조선의 왕권을 안정시키고, 중국과의 경제적·외교적 교류를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조공관계를 맺으면서도 국내 정치에서는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예를 들어, 조선은 중국의 내정 간섭을 거부하고, 자국의 법률과 제도를 스스로 제정했다. 또 한글을 창제하여 자국의 문자를 사용하였고, 민족 문화를 발전시켰다.

또 조선은 중국과의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는 명군의 참전으로 왜군을 물리쳤으며, 19세기 말 청일전쟁에서는 청나라가 패하면서 조선은 독립국의 지위를 확보했다.

따라서 조선시대는 중국과의 조공관계라는 외피 속에서도 내부적으로는 높은 수준의 자치권과 독립성을 갖고 있었다 할 수 있다.

임진왜란에서 본 중한 관계의 역사적 오해
임진왜란은 1592년 일본(왜)이 조선에 침입하면서 시작된 전쟁으로, 7년간 지속되며 조선과 명, 일본 3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전쟁은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큰 위기 중 하나로 꼽히며,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명나라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조선을 지원하였고, 결국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한중 관계사의 일부 오해가 생겨났다. 그 중 하나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망하게 된 것을 구해 준 은혜"라는 뜻으로, 조선이 명나라의 도움으로 나라를 구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실제 임진왜란에서 명의 참전은 조선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이 명나라까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다른 오해는 명이 조선을 '속방(屬邦)' 즉, 종속국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명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도 외교적으로는 독립국으로 대우하였으며, 양국은 서로를 동등한 국가로 인식하였다.

이렇듯 임진왜란에서의 중한 관계를 보는 역사적 시각은 기존의 통념과는 다른 면이 있으며, 보다 객관적인 연구와 이해가 필요하다 할 수 있다.

신미양요와 청일전쟁: 중국 중심 역사관의 문제점
19세기 말~20세기 초 조선의 역사는 격동의 시기였다. 이 시기 일어난 두 사건, 신미양요와 청일전쟁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이들 사건에 대한 서술이 매우 간략하거나 왜곡되어 있어,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드러내고 있다.

신미양요는 1871년 미국이 조선의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으로,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책임과 통상 교섭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우세한 미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패퇴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교과서에서는 이 사건이 “미국이 조선에 무력 침공하였으나, 조선 군민의 저항으로 인해 철수하였다”라고 간략히 서술되어 있다. 이로 인해 마치 조선이 미국의 침략을 격퇴한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다.

청일전쟁은 1894년~1895년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벌인 전쟁으로,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 결과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아시아의 세력 균형이 일본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교과서에서는 이 전쟁을 “중국과 일본 사이의 민족 모순과 갈등이 폭발한 것”이라고 표현하며,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왜곡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 중심의 역사관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왜곡하고, 각국의 상호 이해와 협력을 저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각국은 서로의 역사를 존중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현대사에서 바라본 한중 역사 인식의 차이와 그 영향
한국과 중국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현대사에서는 양국의 역사 인식에 차이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양국 간의 정치·경제·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한반도의 분단과 북한의 핵 문제에 대한 인식이다. 한국은 북한의 핵 개발을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간주하고, 이를 막기 위해 중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북한의 핵 문제를 미국과의 대립 구도 속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북한의 붕괴를 우려하여 적극적인 개입을 꺼리고 있다.

대한민국의 발전과 민주주의에 대한 시각에서도 차이가 있다. 한국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성공적인 민주화와 산업화’로 자평하며, 중국에게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중국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나타난 인권 문제와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이런 역사 인식의 차이는 양국간의 교류와 협력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으므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학생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잊지 않고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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